야요이 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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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요이시대에는 중국대륙과 한반도에서 벼농사가 전래되었습니다. 또 쌀 외에도 바다와 산에서 나는 다양한 산물들을 먹었습니다.
- 밀, 조, 수수, 콩, 호박, 도토리, 호도
- 멧돼지, 닭, 사슴, 곰, 너구리, 개
- 붕어, 잉어, 상어, 숭어, 전갱이, 조개류(우렁이, 모시조개 등)
이러한 것들을 삶거나 구워서 먹었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젓가락을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집어서 먹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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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노가리에서는 샘물이 상당수 발견되었습니다. 간단한 울타리로 둘러싸고 식수를 확보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야요이시대 끝무렵-고훈시대 초기경에 만들어진 우물도 한 군데 발견되었습니다. 일본의 다른 유적에서는 우물터가 발견된 곳이 있는데 요시노가리에서도 발견될 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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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노가리유적에서는 화장실터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다른 유적에서는 원형해자 안에서 사람에게만 있는 기생충이 발견된 예가 있으므로 모아서 원형해자에 버렸을 지도 모르지요. 아직 이 시대에는 목욕탕이 없어서 대신에 강에서 멱을 감았다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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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지왜인전(魏志倭人傳)에 따르면 남자는 천을 몸에 두를 뿐이고 (橫幅衣), 여자는 천 가운데 구멍을 뚫어서 뒤집어 쓴 것(貫頭衣)을 입고 있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요시노가리유적에서는 옹관 속에서 마 혹은 비단천 조각이 발견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신분에 따라 옷의 재료나 형태가 달랐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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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정확하게 확인된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언어에 대해서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단, 위지왜인전에는 위나라와의 교섭/교류 때 [문장을 주고 받았다], [통역이 있다] 등의 기술이 있는 것으로 보아 문자나 언어가 존재했던 것이 분명한 듯 합니다. 또 당시에는 같은 일본 안에서도 언어가 통하지 않는 지역이 있어서 현재의 일본어와 같이 전국이 공통된 것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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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와 같이 색색의 꽃은 적었던 것 같습니다. 잣밤나무나 떡갈나무, 상수리나무나 녹나무가 무성한 숲이나 억새와 띠가 무성한 초원이 펼쳐져 있었겠지요.
유적에서 발견된 많은 식물의 씨앗과 화석, 당시 사용된 목제 도구나 건물에 사용된 목제품 등을 바탕으로 해서 북부규슈의 식물 상황의 변화를 함께 조사해서 당시의 대강의 식물 상황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조사연구의 성과에 근거해서 야요이시대에 있었다고 하는 식물을 가능한한 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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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온에 대해서는 연구자에 따라 여러 의견이 있지만 당시의 식물 생식 상황이나 세계의 지형 등 기온에 영향을 미치는 환경적인 문제까지 포함해서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합니다. 현시점에서는 이러한 연구를 바탕으로 현재보다도 대략 1도 정도 낮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주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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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칼은 벼이삭을 베는 전용 도구로 생각됩니다. 생선이나 고기를 자르지 않은 증거로 날 부분을 조사한 결과 벼에 포함된 지방 성분외에는 확인되지 않은 점을 들 수 있습니다. 돌칼은 손바닥으로 감싸듯이 쥐고 벼이삭을 한 포기씩 훏습니다. 당시의 벼는 야생에 가까운 상태로 열매를 맺는 시기가 현재의 쌀처럼 일정하지 않아서 익은 것부터 순서대로 수확한 것 같습니다. 때문에 베는 낫과 같은 도구가 아니라 익은 이삭을 한 묶음 씩 쥐고 베는 도구가 필요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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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상창고의 기둥과 마루가 접하는 부분에 달려 있는 원형이나 각 부분이 둥근 장방형의 판자를 말합니다. 창고 안에 보관하고 있는 식료품이나 견제품 등이 쥐로부터 습격을 받는 일이 많아서 기둥을 올라오는 쥐가 창고 안에 침입하지 못하도록 달아놓았다고 생각됩니다. 요시노가리에서는 1장의 큰 원형판자를 둘로 쪼개서 끼웠다고 생각되는 [네즈미가에시]가 발견되었는데, 귀중한 식량을 지키기 위한 당시 사람들의 노력의 흔적을 엿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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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예전부터 이곳에 귀중한 유적이 잠들어 있을 것이라고 알려져 있었습니다. 1986년부터 시작된 공업단지 개발에 따른 발굴조사에서 요시노가리가 학술적 가치가 높은 유적인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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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노가리가 야마타이코쿠였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단지 위지왜인전에 기록된 모습과 비슷한 건물터가 발견되었고 복원된 건물 등을 통해서 야마타이코쿠의 모습을 느낄 수 있다는 의미로는 야마타이코쿠의 이미지에 가까운 유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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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인구를 알아내는 것은 아주 어렵습니다. 기본적으로 무덤이나 주거 수 등으로부터 추정하지만 당시의 연료가 장작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주변 삼림의 벌채 등에 의한 환경도 고려해야 합니다. 또한 당시의 사람들이 하루에 어느 정도 음식을 섭취했나, 그 양을 채울 정도의 식량을 확보할 수 있었는가 등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은 아주 많습니다. 요시노가리에서는 이런 여러가지 사안에 대해서도 조사 연구해서 현시점에서는 최고 전성기에 바깥 원형해자 내부에 대략 1200명, 요시노가리를 중심으로 한「구니」전체에는 5400명 정도가 살고 있었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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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와 비교하면 굉장히 짧았던 것 같습니다. 평균적으로 40세까지 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영양상태가 좋지 못하고 병원 등도 없었기 때문에 어린이의 사망률이 특히 높았던 것 같습니다. 요시노가리의 옹관의 40퍼센트가 어린이용인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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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이나 문 위에 나무로 만든 새가 앉아 있습니다. 야요이시대에 새는 벼 등 곡물의 영을 운반하거나 악령으로부터 지켜주는 상징(신의 사자)이었던 것 같습니다. 공원 안에서 새를 몇 마리 발견하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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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조사에서 유적 위에 쌓인 흙을 치워 나가면 무덤이나 기둥의 흔적 등 유구가 나타납니다. 무덤이나 기둥 구멍 흔적은 다른 부분과 비교해서 검은 색을 띠는 흙이거나 흙의 특질이 다르기 때문에 구별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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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기 말부터 4세기 초, 요시노가리의 취락은 갑자기 없어져 버립니다. 이유는 다양한 의견이 있습니다만,
- 요시노가리 취락 주변에 있는 작은 취락은 그 후에도 남아 있다
- 원형해자 안에 생활토기 등을 버리고 갔다
등으로 보아 자신들의 의지에 의해 이 곳을 떠났을 지도 모릅니다. 고훈(古墳)시대에는 개인이 큰 권력과 부를 가지는 시대가 되는데 이러한 사회의 흐름 속에서 요시노가리의 사람들도 사는 곳을 바꿔나갔을 지도 모릅니다.